강론

최진혁 안셀모 신부님께서 미사 때 나누신 말씀입니다. 주일 미사와 평일 미사, 수녀원 영어 미사의 강론을 함께 모았습니다.

2026-9-20 한가위 합동 위령미사

작성자
최진혁 안셀모 신부
작성일
2026-09-20 08:59
조회
12

올해는 한가위 위령미사를 조금 일찍 봉헌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순교자들을 기리는 미사가 있어, 우리 공동체는 한 주 앞당겨 조상들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사지향을 준비하면서 조금 죄송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명절 당일에, 혹은 조금 더 가까운 날에 기억해 드리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제대 앞에 붙이다 보면, 날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의 삶과 우리 가족의 모든 기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하나씩 바라보다 보면 문득 생각합니다.

이분들에게는 어떤 삶이 있었을까.

가족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도 있었을 것이고, 미처 풀지 못한 서운함과 아픔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좋은 기억도, 좋지 못했던 기억도, 감사도 아픔도 모두 하느님의 자비 안에 맡겨 드립니다.

해가 지날수록 그 이름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돌아가신 한 분 한 분의 이름으로 보였다면, 이제는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

‘우리의 조상’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기도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그 기도와 함께 이제는,

“이분들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도 복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조상들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서 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오늘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복을 받고,

또 우리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유산은 결국 신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요즘 신앙이란 결국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말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에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내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 보고,

내 시간과 수고를 내어놓아 보고,

그리고 그 봉헌을 통해 하느님께서 다시 채워 주시는 기쁨을 경험해야 합니다.

저도 한때는 자주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말로는 참 많이 떠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 와서 살다 보니, 제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꽤 많았습니다.

크고 대단한 일들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하나씩 직접 하고, 수고하고, 때로는 귀찮은 일까지 마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에 큰 기쁨이 남았습니다.

‘아, 내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봉헌할 수 있었구나.’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봉헌할수록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에게 더 많이 주시는구나.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조금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겨우 이것 조금 내어놓으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사람들을 주셨고,

사제직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결국 당신 자신까지 모두 내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나는 아주 조금을 내어놓고 그것을 ‘봉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신앙도 그렇게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봉헌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수고를 봉헌했고,

누군가는 눈물 속에서도 자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한가위에 조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들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삶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받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조금 일찍 드리는 한가위 위령미사이지만 우리의 감사도, 우리의 기도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오늘 먼저 떠난 이들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며, 동시에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 조상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그분들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시고,

특별히 우리가 받은 신앙의 기쁨을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게도 전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당신께 조금 더 기쁘게 봉헌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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