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최진혁 안셀모 신부님께서 미사 때 나누신 말씀입니다. 주일 미사와 평일 미사, 수녀원 영어 미사의 강론을 함께 모았습니다.

2026-9-13 연중 24주일 강론

주일 미사
작성자
최진혁 안셀모 신부
작성일
2026-09-12 20:16
조회
18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울 때였습니다.

영어 시간에 forgive, 용서하다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처음 배우니까 제 눈에는 이게 두 단어처럼 보였습니다.

For-give.

Give는 ‘주다’라는 뜻이니까,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용서한다는 것은 다시 무언가를 주는 것이구나.”

누군가와 크게 싸우면 “너 다시는 안 봐.”

하면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한다는 것은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forget, 잊어버리다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이것도 혼자 나누어 보았습니다.

For-get.

Get은 ‘얻다’라는 뜻이니까,

“무엇인가를 다시 얻으려면 잊어야 하는구나.

그 친구와의 관계를 다시 얻으려면

그 사람의 잘못과 과거를 잊어 버려야 하는구나.”

불현듯 용서를 생각하면서 그때가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어제 혹시나 해서 이게 진짜일까 찾아봤습니다.

실제 영어 어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시절에 그럴때가 있잖아요.ㅋㅋ 개똥철학이라고,, 뭔가 깨달은것처럼 아!했을 때,,ㅋㅋ

그래도 저는 그때 했던 생각이 용서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그런데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끌려옵니다.

만 탈렌트는 한 사람이 평생 일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금 앞에 엎드려 애원합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단순히 기다려 준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모두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받고 나온 사람이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만 탈렌트에 비하면 정말 작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말합니다.

“빚진 것을 갚아라.”

자기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작은 빚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쁘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용서는 한 번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한 번도 힘든데

일흔일곱 번이 말이 됩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산속에 들어가 살면

어쩌면 평생 모든 사람을 용서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쪼잔해졌던 때가

신학교 단체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는 외부와 거의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외출도 어렵고, 방문도 어렵고,

전화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가능한 것은 편지를 쓰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처음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함께 살다 보니

별것 아닌 일에도 민감해집니다.

신학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강의실에 제가 지갑과 초코파이를 함께 놓고 나왔다가

나중에 돌아가 보면,

지갑은 그대로 있는데 초코파이는 없어집니다.

또 일주일에 한 번 라면을 나누어 주는데

인기 있는 라면을 앞사람들이 두세 개씩 가져가서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족하면 난리가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습니다.

어차피 사제가 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고,

얼마나 많은 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까?

앞으로 살아가며 하느님께 받을 은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라면 하나,

초코파이 하나가 뭐라고

그렇게 마음을 쓰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가

언제나 한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만약 모든 가족이 아무런 갈등 없이 산다면

아마 드라마 작가들이 일거리를 상당히 잃을 겁니다.

드라마의 절반이 가족 싸움이고 부부 싸움이니까요.

저도 신학교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 살라고 하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사제관에 누군가 며칠 손님으로 와 있어도

괜히 불편해서 잠을 잘 못 잘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해본적이 있었습니다.

용서는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일까?

물론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용서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끔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수십 년 전 시집왔을 때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시어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몇십 년 전 일인데도 기억하십니다.

그날 누가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밥상에 무엇이 올라왔는지,

숟가락이 몇 개 있었는지,

시어머니가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기억합니다.

그만큼 상처가 컸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기억을 평생 붙들고 살다 보면

몸은 오늘을 살아가는데

마음은 아직도 수십 년 전 그 방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자신에게도 며느리가 생깁니다.

그러면 또 말합니다.

“나는 옛날에 이렇게 힘들었단다.

그래서 나는 너한테 그렇게 안 한다.”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오래된 상처가

새로운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가

오늘의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용서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픈 일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더 이상 오늘의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아야 할 작은 빚 하나를 놓지 못해서

결국 자신이 받은 자유까지 잃어버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명을 주셨고,

가족을 주셨고,

좋은 사람들을 주셨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셨고,

무엇보다 수없이 많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은 빚 하나 때문에

평생 마음의 감옥에서 살아간다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세상도 보고, 좋은 이웃도 만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시간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갚아야 할 백 데나리온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탕감해 주신 만 탈렌트의 은총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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